《멕시코 서남부 치아파스주의 밀림지역인 팔렝케. 메소아메리카 유적지 중 가장 아름답고 신비한 곳으로 꼽히는 이 고대도시에서 발견된, 마야의 왕 파칼의 피라미드는 고대 한국의 장군총과 그 규모나 모양새가 너무 똑같았다. 게다가 파칼왕의 머리는 한반도 남부 가야에서 고대 귀족여인들이 했던 두개골변형 풍습을 그대로 닮고 있었다. 이 모두가 우연의 일치일까.》


    마야 문명」으로 대표되는 멕시코의 피라미드 유적과 인디오 문화를 살펴보려면 먼저 한국에서 두세 곳의 문화 유적지 정도는 공부 겸 눈요기삼아 답사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먼저 둘러볼 곳이 경북 안동시 석탑동에 있는 안동탑과 경남 산청의 산청탑이다. 안동탑과 산청탑은 석축이나 돌더미를 여러층 쌓아올린 방단(方壇;사각 기단)형 묘탑(墓塔)으로 압록강 북쪽 집안지방의 고구려 장군총과 똑같은 형식을 하고 있다. 쉽게 말해 한국판 「계단식 피라미드」 혹은 「고구려 식 피라미드」인 것이다.


안동탑은 밑변이 13.5×13.2m로 5개의 기단을 가진 피라미드이고, 산청탑은 7개 기단으로 된 피라미드다. 두 개 탑 모두 꼭대기 중앙부분에는 상륜(相輪)과 같은 장식을 갖추고 있다. 산청탑의 경우 탑 아랫부분에 불상을 넣는 감실이 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안동탑과 산청탑이 너무 멀어 가기가 힘들다면 서울 방이동에 있는 백제고분을 답사해도 좋다. 원형을 많이 상실하긴 했으나 그런 대로 고구려식 피라미드가 어떻게 생겼는지 감상할 수 있다.


학자들은 이러한 피라미드가 한반도의 고인돌에서 출발하여 주신(한자조선) 과 고구려를 거쳐 북쪽으로는 유라시아 쪽으로 남쪽으로는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까지 진출했다고 말한다. 일본의 후쿠오카현 구마야마(熊山), 오사카의 나라 등지에서도 흙으로 만든 고구려식 피라미드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나타난 두개골변형 풍속


두번째 찾아볼 곳은 부산대학교 박물관이다. 그곳 전시실 한쪽 구석에는 잘 보존 처리된 고인골(古人骨)들이 있다. 그중 이마 윗부분이 심하게 납작해진, 그래서 정상인의 두개골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두개골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수상하게 생긴 유골은 옛 가야지역, 현재의 지명으로는 경남 김해군 대동면 예안리 시례부락에서 출토된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납작이마 두개골의 골반뼈를 조사해본 결과 주인공은 귀족층으로 추정되는 여성이며, 4세기 전엽 가야시대때 살았던 인물이라고 판정했다. 두개골의 변형은 비단 이 여성뿐 아니라 10구의 다른 인골에서도 발견됐는데, 이는 당대의 어떤 풍습에 의해 인위적으로 머리를 변형시킨 것으로 추정됐다. 또 이렇게 인위적으로 납작해진 두개골은 머리뼈가 굳기 전인 어린아이때 변형됐을 것이라고 한다.


고고학계에서는 잠정적으로 적어도 4세기 전엽이라는 특정한 시기에, 예안리 인근에서는 가야의 특정한 집단 혹은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이 「편두(遍頭:이마와 앞머리를 납작하게 만드는 두개골 변형)」라는 이상한 풍습을 가지고 있있던 것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고구려식 피라미드와 가야 여인의 편두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이제 멕시코로 날아가보자. 아직까지 멕시코 직행 항로가 개설되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을 거쳐 멕시 코시티로 가게 된다. 비행기로 대략 16시간 걸리는 거리다. 멕시코시티에서 다시 고속버스로 15시간 정도 걸리는 멕시코 서남부 치아파스주의 팔렝케를 먼저 찾아볼 일이다.


멕시코의 고대문화 즉 메소아메리카 문화(멕시코, 과테말라 등지에서 발견되는 고대문화의 총칭)의 정수를 이해하려면 팔렝케에서 한 역사적 인물부터 추적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팔렝케의 위대한 발굴


때는 1949년, 장소는 모기떼가 온종일 사람들에게 헌혈을 요구하고 일년 내내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고온과 불쾌한 습기가 사람을 괴롭히는 밀림지역이다.


어떤 영감 때문인지 알베르토 루스(멕시코 고고학자, 당시 멕시코 국립 고고학 연구소장)는 푸른 이끼가 덮여 있고 마냥 평범해 보이는 한 언덕을 주시했다. 땅 속에 특별한 피라미드가 있으리라는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언덕은 결코 아니었다. 만일 언덕이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태를 하고 있었다면 서구의 고고학자들과 호기심 많은 탐험가들이 그때까지 그냥 놔둘 리 없었을 것이다.


사실 알베르토 루스가 발굴하려고 마음먹은 팔렝케 지역은 열악한 환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마야문명을 찾아 헤매는 선배 고고학자들에 의해 이미 여러차례 「유린」당했던 터다.


루스는 자기 몫으로 남은 이 평범한 언덕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인부들을 동원해 한참 동안 언덕의 흙과 잡석들을 제거했다. 이윽고 무언가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단단 한 돌 널조각(석판)들 위에 세워진 건물이 그 속살을 조금씩 조금씩 보여주었다. 흙과 잡석을 다 고르니 9개의 기단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위에 세워진 신전이 완연했다.


이전에 발굴된 다른 피라미드 신전들에 비해 외형상 특별한 차이점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견고하면서도 용의주도하게 지어져 보존상태가 썩 좋았다. 신전은 3개의 방으 로 이루어져 있었다. 벽면에는 6백여개의 알 수 없는 마야 상형문자와 신화적 그림들로 치장돼 있었다.


방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루스는 중앙 방에서 바닥에 깔린 네모난 석판들을 내려다보았다. 석판 중 하나가 다른 데보다 조금 볼록한 것이 눈에 띄었다. 바닥을 깨끗이 쓸어내 고 보니 석판 양쪽으로 일련의 구멍들이 두 줄로 늘어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루스는 인부들을 시켜 지렛대를 가져오게 한 다음 석판을 들어올려 보았다.


석판 밑에는 땅을 다져주기 위한 잡석들이 죽 깔려 있었다. 잡석들을 80cm쯤 파헤쳐 들어가자 그 사이로 아치형의 돌이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잡석이 아닌 인위적으로 배치된 돌이었다.


노련한 고고학자의 눈에는 예사롭지 않은 것이었다. 잡석들을 제거하면서 더 파헤쳐보자 분명 석회암으로 만든 아치형 계단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것은 신전 지하 즉 피라미드 내부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잡석들은 오래전에 누군가의 의해 의도적으로 피라미드 내부의 지하 통로를 막기 위해 갖다놓은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그때까지 발견된 다른 피 라미드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였다.


루스가 이끄는 발굴팀은 행여 유적이 파손될까봐 일일이 손으로 잡석들을 파내 밖으로 옮기는 한편으로 좁고 가파른 석회암 계단을 차근차근 밟고 내려갔다. 그것은 길고도 지루한 작업이었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더 무거운 돌덩이들로 채워진 데다 산소마저 희박해 참을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1949년에 발견한 것이 1년이 지난 1950년에야 겨우 45번째 계단까지 내려왔다.


여기에서 지하계단 바닥이 오른쪽으로 꺾이면서 평평한 부분이 나타났다. 피라미드 내부 벽에는 직사각형으로 된 2개의 구멍이 있었다. 외부로 연결된 듯한 이 구멍들은 바깥의 빛과 공기를 받아들이는 곳임이 분명했다. 루스는 다소 신선해진 공기를 마시며 다시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더 파내려갔다.


21개의 계단을 더 내려가자 갑자기 돌과 점토로 된 두터운 벽이 나타났다. 벽을 조심스럽게 제거하니 수평의 좁은 통로가 나타나면서 2m 전방에 앞의 장벽보다 더 잘 다져진 돌벽이 또 가로막고 있었다. 처음과 두번째 장벽 사이에 있는 수평의 통로에는 점토로 만들어진 작은 함이 놓여 있었는데 도자기, 옥 세공품, 진주, 조개껍질 등이 담겨 있었 다. 도굴꾼들이 탐낼 만한 유물들이었다.


유물들을 추스르고 두번째 장애물에 다가갔다. 두께만도 4m는 족히 됨직한 돌과 석회로 만든 벽이다. 저 안에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인부들도 흥분해마지 않았다. 루스는 행여 인부들이 실수라도 할까봐 주의를 주며 두번째 장애물이 철거되기를 기다렸다.

 


최초로 발견된 피라미드 속 무덤


벽이 뚫렸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들. 그곳에는 육체를 잃어버린 6구의 유골이 곰팡이를 뒤집어쓴 채 발굴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여성의 유골도 있었다. 인부들은 실망스러웠을지 모르나 이 멕시코 고고학자를 경악시키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이제까지 마야의 피라미드 지하에서 유골이 발견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루스는 복도 맨 끝쪽에 있는 세번째의 장애물도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첫번째, 두번째 벽과는 달리 삼각형으로 된 커다란 석판이었다. 인부중 한 사람이 쇠지레로 석판에 조그만 구멍을 내자 석회와 자갈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무릎을 꿇고 한 손에 손전등을 든 채 구멍 안을 들여다보던 루스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한참 동안 아무말도 하지 못했 다. 그곳은 관을 안치한 석실이었다.


삼각형 석판을 옮긴 다음 네 계단을 내려가 들어선 석실은 길이가 9m에 너비는 4m, 높이는 7m에 이르는 아름다운 아치형 동굴이었다. 벽과 천장은 모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방 가운데는 네모지게 만든 석관이 있었다. 둥근 천장에서는 종유석이 커튼처럼 늘어져 있고 바닥에는 양초의 촛농처럼 생긴 두꺼운 석순이 있는데, 영겁의 세월이 흘렀음을 웅변하는 듯했다.


주위 벽에는 예스러운 복장을 한 아홉 사람이 스투코(장식 벽토)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저승세계를 지배하는 신들인 「밤의 아홉 주님(Nine Lords of Night)」으로 동양식으로는 9개의 하늘 즉 구천(九天)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9신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 방의 주인을 안내하고 보호하기 위한 상징 체계였다. 마야 신화에 나오는 9신이 보호하는 이 방의 주인은 생전에 존귀한 존재였음은 고고학의 아마추어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주인은 방 가운데 놓인 석관속에 누워 있을 것이다. 석관 뚜껑은 무게가 5t이나 되는 거대한 사각 석판이었다. 가로 3.8m에 세로 2.2m, 두께가 23cm 크기인 석판은 매우 복잡한 부조로 장식돼 있었다. 석판 두께 부분인 가장자리에도 알 수 없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 아름다운 석관 뚜껑 하나만으로도 위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될 것이었다.

 


멕시코 고고학자들의 충격


이제 석판 뚜껑을 열어젖힐 마지막 단계에 왔다. 1952년 6월15일, 그러니까 푸른 이끼가 낀 평범한 언덕을 파헤친 지 햇수로 무려 4년만에 정점에 다다른 것이다. 루스는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서고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끼면서 기중기로 석판을 들어냈다. 이윽고 관 안을 들여다본 루스는 그만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는 결국 지난 60여년 동안 확고한 권위를 잃지 않던 마야학자들의 학설을 전면 철회해야 하는 증거물과 맞닥뜨렸다. 그것은 20여개의 비취(옥돌)로 모자이크된 장례용 가면을 쓴 한 남자의 유골이었다. 그때까지 이집트 피라미드와는 달리 멕시코의 피라미드에서는 매장된 유골이 나와서는 안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것은 선배 학자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정설이었고 루스도 전적으로 동의하던 학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렝케의 유골은 그런 학자들을 조롱이나 하듯이 당당하게 등장했다. 유골의 얼굴을 덮은 가면은 죽은 뒤 얼굴 위에 회반죽을 바르고 그 위에 일일이 비취조각을 붙여 완성한 모습이었다. 이와 같은 가면은 다른 마야 신전에서는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


또 가면은 이마에서 앞머리 윗부분까지 편두처럼 푹 꺼져 있었는데, 마치 가야여인의 편두형 머리와 비슷했다. 눈은 흰 조개껍질(눈자위)과 흑요석(눈동자)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약간 벌어진 입 속에는 옥같은 것이 살짝 물려 있는 형태였고 두 손바닥과 두 발에도 각각 동그랗게 만들어진 비취가 놓여 있었다. 매장을 할 때 무언가 의미를 부여 한 풍속 같았다. 이것 역시 동양의 장례 풍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의식이었다.


이외에도 유골에는 왕관을 비롯해 꽃과 과일 모양의 구슬로 꿴 목걸이와 마야 상형문자가 새겨진 귀걸이가 달려 있는가 하면, 열 손가락 하나하나마다 반지 등이 끼워져 있었다. 모두 마야인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투명한 비취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유골 옆에는 회반죽으로 화장(化粧)해서 만든 두 개의 두상(頭像))도 발견됐는데, 그의 얼굴 을 기념해 새긴 듯했다. 이 역시 편두 이마의 조각상이었다.


이 무덤 주변을 완전히 발굴한 루스는 이곳이 9개의 기단으로 된 계단식 피라미드이며 그 상층부에 신전이 있고, 신전 지하로 연결된 통로를 따라 왕의 유골이 안치됐음을 밝혀냈다. 유골이 있는 방은 피라미드식 건물 바닥 수평면에서 보면 2m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데 유일하게 마야의 매장문화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팔렝케 유적에서 루스가 발굴한 이 「보물단지」는 멕시코 뿐 아니라 전세계 고고학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특히 멕시코의 마야학자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빛바랜 마야문명 독자론


그동안 마야학자들은 마야문명의 독자성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고대문명 전파론자들이 멕시코와 이집트 문화의 직접적 연관성을 거론하면서 그 강력한 증거로 양쪽 피라미 드의 유사점을 거론했을 때도 마야학자들은 다른 근거를 들며 문화적 수입 같은 것은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즉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왕(파라오)이 매장된 방 주변을 돌로 쌓아올려 만든 거대한 무덤인 반면, 멕시코의 피라미드들은 무덤이 아니라 정글 위로 솟아 있는 사원을 지탱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단순한 계단식 구조 물이라는 것.


그 와중에 루스가 발굴한 팔렝케의 피라미드는 마야문명의 독자성을 옹호하는 학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말았다. 발굴 당사자인 루스조차 처음에는 이것이 마야 피라미드의 예외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애써 문명 전파론자들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루스의 발견 이후 또다른 마야 유적지인 과테말라의 티칼에서도 무덤형 피라미드가 발견됐고, 지난 94년에도 또다시 무덤 피라미드가 발견됨으로써 문명 독자론은 빛을 잃고 말았다.


어쨌든 알베르토 루스는 6백여개의 상형문자가 새겨진 장문의 비문을 발견, 중앙아메리카 문명의 시초와 몰락에 관한 보편적 연대기를 작성하는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중앙 아메리카 발굴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고고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마야학자들은 마야 최대의 비문이 발견된 이 무덤식 피라미드를 기념해 「명각(銘刻)의 신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팔렝케 유적을 모르고서는 마야문명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들 말한다.


루스의 발굴 이후 마야학자들은 명각의 신전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해독한 결과 무덤의 주인이 「방패」라는 뜻을 지닌 「파칼 왕」임을 밝혀냈다. 상형문자 기록에 따르면 파칼왕은 12세에 왕위에 올랐고 80세인 기원후 683년에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니까 피라미드는 683년 이후에 그의 아들(찬 발룸)이 건립한 것으로 추정됐다. 또 파 칼왕이 이끌던 마야인들은 9세기 무렵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돌연히 사회가 붕괴된 것으로 분석됐다.

 


고구려식 피라미드에 잠든 마야의 왕 (그 머리가 백두산을 향해 있다)


루스의 고고학적 행적을 뒤쫓고자 멕시코시티에 도착하기가 바쁘게 찾아온 팔렝케. 시내 한복판에는 팔렝케의 상징으로서 편두의 파칼왕이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는 거대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데, 마치 1천여년 전의 파칼왕이 살아서 아직도 이곳을 지배하는 듯한 환상마저 준다.


실제로 이곳 주민들 상당수가 파칼왕의 팔렝케 유적을 기념한 갖가지 상품들과 관광객을 겨냥한 숙박시설 및 교통편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것을 보면 그다지 틀린 착각만은 아닌 듯하다.


팔렝케 시내에서 유적지까지는 택시로 약 20분 거리. 40여년전 루스의 발굴 때나 관광지로 다져진 현재의 시점에서도 밀림으로 우거진 팔렝케를 찾아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열대의 폭염과 숨통을 누르는 습도, 사정없이 달려드는 모기떼들, 그리고 높이가 족히 30m쯤 되는 나무들이 우거진 밀림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유적 사이를 걷노라니 얼기설기 뻗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형형색색의 마코새(앵무새의 일종)들이 날아다니고 있고, 간간이 들리는 밀림속 원숭이들의 울음소리 또한 원시의 색감을 더 강하게 자극한다.


파칼왕 시대에도 과연 이런 상태의 자연환경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야 사람들은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나타났다가 또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는 이상한 특질을 보이며 그 당시의 기후환경과 풍속, 문화 등을 알 수 있을 만한 기록이 별로 남겨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파칼왕의 「명각의 신전」과 주위의 여러 피라미드들은 여러모로 동아시아적인, 특히 한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마코새와 원숭이, 그리고 밀림이 아니라면 만주에 있는 고구려 고분군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고구려식 피라미드는 만주의 집안과 환인지역 일대에 약 1만2천여기가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다.


특히 높이 30m에 9개의 기단으로 이루어진 파칼왕의 피라미드는 그 규모나 구조가 집안에 있는 고구려 장군총을 연상케 한다. 7개의 기단을 계단식으로 올려놓은 장군총은 바닥 기단의 한 변이 32m나 되는 대표적인 한국식 피라미드. 파칼왕의 피라미드가 피라미드 지하에 석실과 석관이 있다면 장군총은 제5층 기단 내부에 석실과 석관이 있다. 차이점이라면 파칼왕은 혼자 영면한 반면 장군총은 부부의 무덤으로 2개의 석관이 있다는 점이다.


또 멕시코의 대부분 피라미드가 그러하듯 파칼왕의 피라미드도 4각형의 기단 면이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는데, 장군총은 기단의 면 대신 모서리가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오히려 방위를 가리키는데 있어서는 면보다는 모서리가 훨씬 세련된 편일 것이다.


그러나 양 피라미드의 유사성을 비교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는 피라미드 정상에 있는 신전이다. 특히 신전은 멕시코 고고학자들이 이곳 피라미드의 독창성을 주장하는 가장 유력한 증거물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파칼왕의 피라미드는 정상에 화려한 장식을 한 신전이 세워져 있는 반면 장군총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장군총 꼭대기가 원래부터 텅 빈 공간은 아니었다. 고구려 고분군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장군총 정상의 돌덩이에 작은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패어 있는 것을 발 견하고 그것을 난간을 꽂는 주공(柱孔)으로 보았다. 게다가 건물의 기초석이 일정한 간격으로 남아 있는 것도 확인함으로써 피라미드 정상에 모양은 알 수 없지만 뚜렷한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음을 밝혀냈다. 더 나아가 이화여대 申瀅植교수(신형식·한국 고대사)는 『장군총 정상에 사당을 짓고 하늘과 조상에 제사를 지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장군총 역시 피라미드 위에 신전이 있다는 것이다.


문명 전파론자들이 파칼왕의 피라미드에서 무덤이 발견됨으로써 이집트와 멕시코 문명을 슬며시 연결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국의 피라미드와 연결시켜 전파론을 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집트의 대표적인 카이로 피라미드는 계단형도 아닌 방추형 피라미드로 꼭대기에 신전같은 것도 없는 매우 이질적인 구조물이 다.

 


청반점 인종이 세운 피라미드


불현듯 우리나라 문화재 전문위원이자 고건축물 전문 목수인 申榮勳(신영훈)씨가 지난 68년 멕시코 올림픽 때 멕시코를 방문한 뒤 한국에 돌아와 고백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때 멕시코시티에 가서 「한국정」을 지었다. 틈틈이 주변 유적지를 방문했는데 방단(方壇)으로 치켜 쌓은 대규모 건축물들이 있었다. 신전을 그런 방단 위에 높게 지었 다. 그때 들은 바로는 이런 방단 쌓은 종족의 엉덩이에 푸른 점(청반점, 몽고반점)이 있었다고 하였다. 한국정 준공식날 그곳 사람들은 내가 입은 한복의 대님 맨 바지를 쓰 다듬으며 전에 이런 의복을 입었다고 했다. 높은 산에 사는 고산족은 거의 우리와 같은 풍습을 지녔다고 그곳 동포가 귀띔해 주었다. 같은 계열의 민족이 방단(계단식 피라 미드)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은 충격이었다.


방단이란 점에서 이집트 피라미드도 같은 계열이 된다. 카이로의 방추형 피라미드를 제외하면 주류가 방단형이다. 스핑크스가 지키고 있는 거대한 방추형 피라미드 뒤에 있 는 작은 규모의 배총 중에도 여실한 방단형이 있다』


결국 신씨는 고건물 건축 전문가로서, 또 한국인의 눈으로 멕시코에서 대규모로 발견되는 피라미드군과 이집트에서 소규모로 존재하는 계단식 피라미드가 고구려 시대 무 덤형 피라미드와 유사하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광대한 대륙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동북아시아의 고구려와 아프리카 북단의 이집트와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에서 같은 양식의 피라미드군이 존재한다고 해서 문명의 전파론을 역설할 수 있을까.


일단 여기서는 이집트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제외하기로 하자. 신씨의 말마따나 이집트인들은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없는 이질적인 종족이어서 피라미드를 가지고 그 문화적 유사성을 따지기에는 현시점에서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대신에 혈연적으로 청반점을 업보처럼 갖고 태어나는 동이족(東夷族)과 멕시코 인디오들의 연관성은 한결 비교하기가 수월할 것이다. 논쟁을 단순화시키자면 양자의 피라 미드는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문화의 직접적 교류 현상인가다. 주목해볼 점은 양자의 피라미드 건설시기일 것이다.


파칼왕의 피라미드는 683년 이후에 건설된 피라미드다. 이때는 신라가 중국의 당나라와 손잡고 삼국을 통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시기적으로 볼 때 파칼왕의 피라미 드는 장군총(서기 3세기 이전으로 추정)보다는 훨씬 후에 건설된 피라미드다.


그런데 파칼왕의 피라미드처럼 무덤은 발견되지 않으나, 외형상 비슷한 구조를 가진 다른 멕시코 피라미드들은 그 건설 시기가 훨씬 과거로 거슬러올라간다. 먼저 멕시코 최대의 박물관인 국립인류학박물관에서 펴낸 책자를 통해 메소아메리카 문화의 탄생과 발전 과정을 대략 짚어보자.

 

 

누가 먼저 피라미드 지었나?

 

빙하시대가 끝날 무렵 바닷물의 결빙에 따라 수위(水位)가 내려가자 육교가 된 베링지역을 통과해 아시아의 구석기 수렵민이 조금씩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들의 긴 수렵시대가 끝나고 농경민 시대가 도래한다.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 내지 3천5백년 전에는 멕시코 중앙부에서 남부에 걸쳐 옥수수를 재배하는 마을들이 여기저기 자리잡았다. 이후 토기와 토우 예술 및 파라미드들이 건설됨으로써 문호가 꽃피게 된다.


멕시코 학자들은 이 시기부터 전기(前期)고전기(BC 1200년~BC 100년), 고전기(BC 100년~AD 900년), 후기(後期)고전기(AD 900년~AD 1521년)로 나누어 문명의 변천사 를 기록한다.


전기 고전기때 멕시코 동부 해안 지방, 즉 멕시코만 연안에 강력한 종교문화가 탄생한다.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시조인 올멕문화가 그것이다. BC 1200년에서 BC 200년까지 올멕인들은 중앙아메리카 곳곳에 문화를 흩뿌린 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이후 고전기로 들어오면서 테오티와칸(BC 200년~AD 650년) 문명이 펼쳐지고 그 과정에서 다시 톨텍 마야 등 문명이 성장하게 된다. 따라서 멕시코를 대표하는 마야문명은 사람들이 착각하듯 메소아메리카 최초의 문명이 아닌 선대문화를 계승한 것이며, 주인공 파칼왕은 바로 마야문명의 대표적 인물에 해당한다.


한편 방단형의 계단식 피라미드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대략 BC 800년에서 BC 200년 사이. 멕시코 우악사툰(우악사카)에서 이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피라미드 (E-VII-Sub으로 명명)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테말라의 티칼에서도 BC 300년 경에 지은 작은 기단이 발견되기도 했다. 파칼왕의 피라미드도 이같은 건축문화 영향 을 받고 건설된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장소를 이동해 한국의 고구려식 피라미드로 눈을 돌려보자. 학자들은 장군총과 같은 피라미드(적석총)는 고구려 초기의 무덤 양식으로 대체로 3세기 말엽까지를 그 하한시 기로 잡고 있다.


반면에 고구려 피라미드가 언제,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고구려의 건국연대에 대해 여러 학설이 분분한 가운데, 북한의 주장처럼 건국연대를 BC 277년으로 본다면 고구려식 피라미드 역시 그 기원은 서기전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그 문화를 고조선으로부터 이어받았다는 게 정설이다. 즉 고구려 의 파리미드 장묘제 역시 고조선 문화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에 흥미로운 고고학적 유물이 중국에서 발견됐다. 지난해 말경 중국 양자강 상류에 있는 용마고성 유적에서 발굴조사를 벌이던 중일(中日) 공동 장강문명 학술조사단(단장 우메하라 다케시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고문)은 약 5천년전에 쓰인 제사용 토단을 발견함으로써 황하문명보다 1천여년 앞선 문명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제사용 토단은 한 집단이 종교적 형태를 갖춘 문화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고고학적 증거다.


문제의 토단은 3개의 기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일 아랫단은 남북 80m, 동서 40m의 직사각형이다. 각 단의 높이는 2m에 달했다. 재질이 돌은 아니지만 분명히 초보적인 계단식 피라미드였다. 또한 조사단은 제단의 주축이 정남북방을 가리키고 있는 점과 제사의 희생물로 추정되는 사람의 뼈가 함께 발굴된 점 등을 근거로, 이곳에 태양숭배 신앙을 가진 도시국가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런데 장강문명의 기원 연대와 비슷한 또다른 문명은 우리 민족의 발상지와 깊은 관련이 있는 중국 동북3성(만주)지역에서도 발견된다. 지난 86년에 중국 고고학계의 발굴 보고서(문물 86-8기)가 나온 요령성의 우하량 유적지에서는 돌로 만든 제단과 흙으로 구워 만든 신상의 머리 부분이 발굴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었다. 그 연대도 기원 전 3천7백년전까지 올라갔다.


후기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이 유적지에 중국 학자들은 `「홍산문화」란 이름을 붙였다. 홍산문화 역시 종교의 권위가 뒷받침하는 정치권력이 등장했음을 보여주는 유적 이라는 점에서 독자적인 고대문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단국대 윤내현 교수(사학)는 『홍산문화는 고조선 등 한민족의 고대사와 직결돼 있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 학자들은 그 중요성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면서 『홍산문화와 장 강문명 등 새로운 고대문명의 면모가 드러나고 있는 이상 황하중심의 동아시아 고대사 인식은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어찌됐든 홍산문화와 장강문명에서 피라미드의 원형이 발견됐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홍산과 장강 문명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그들은 동북아시아인 이며, 그 문화가 고구려까지 이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 분명한 것은 동아시아의 피라미드가 멕시코의 피라미드 건축연대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도 피라미드 있습니까?』


사실 고구려식 피라미드와 멕시코 피라미드의 연관성을 거론하는 문제는 전문 학자들도 다루기가 매우 미묘한 문제다. 멕시코 고고학자들은 아시아인종이 구석기시대에 베링해를 간헐적으로 건너온 이후 어느 시점부터는 아시아와 아메리카는 단절됐으며, 아시아에서 직접적으로 유입된 문화적 증거 또한 없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메소아메 리카 문화는 아메리카에서 독창적으로 발전한 문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적지 않은 모순도 지적된다. 피라미드를 예로 들면 BC 3세기경 발달된 형태의 피라미드가 느닷없이 멕시코 일대에 등장하는데, 그 비슷한 연대에 아시아에서도 장강과 홍산의 그것보다 발달된 피라미드가 대량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것도 우연의 일치일 뿐일까.


멕시코 고고학자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알프레도 로페스 오스틴(Alfredo Lopez Austin)교수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는 고대종교와 우주관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학자로 유명하다. 그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팔렝케에서 다시 멕시코시티의 국립대를 찾아갔다.


『멕시코문화와 아시아문화는 결론적으로 매우 비슷하다. 둘다 사유체계에 있어 이중 개념(음과 양)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문화에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하늘에 천주(天主)가 있으면 반드시 땅에는 지하 왕(염라대왕)이 존재하는 식으로 말이다. 인디오들의 의술을 보아도 그렇다. 인디오들은 열기로 병에 걸렸을 때 찬 기운을 가진 약 초로 치료를 한다. 한기에 의해 병들었을 때는 반대로 더운 기운의 약초를 사용한다. 이렇게 항상 음양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로페스교수는 이러한 문화적 사유체계는 같은 인종이 비슷한 생각을 하는 데서 비롯된 것일 뿐으로, 전기 고전기 이후 멕시코 문명에 아시아 문화가 직접 유입돼 발 생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한국의 피라미드와 멕시코 피라미드의 유사성에 대한 의혹 역시 이 멕시코 학자로부터 만족할 만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피라미드도 인간의 정신세계가 비슷하기 때문 에 양 대륙에서 각기 비슷하게 발전한 것 아니겠느냐는 식이었다.


그는 고대 한국에 피라미드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잘 모르고 있었다. 하긴 우리나라 서울대보다 훨씬 크고 시설 좋은 멕시코 국립대 도서관에 한국에 관한 서적이 단 한권 도 없다는 현지 유학생의 말을 듣고 보면 로페스교수를 탓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는 최근 들어 메소아메리카 문명을 건설한 종족들이 비단 베링해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중앙아메리카로 들어왔을 것이라는 학설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마야언어를 전공하고 있는 언어학자 오토 슈만(Otto Schumann)교수는 흥미로운 사실을 지적했다. 마야의 언어구조는 한국어 및 일본어의 언어구조와 매우 유 사하며, 더 연구해 보아야 하겠지만 태평양권의 언어와도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어와 유사한 마야언어를 설명해 달라는 요청에 재미있는 사례 를 들려주었다.

 

 

한국어와 유사한 마야언어

 


『한국인들은 파랑색과 녹색을 구별하지 않는다. 녹색의 신호등 빛을 보고서 파란 불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마야인들도 파랑색과 녹색을 구별하지 않는다. 언어학에서는 이를 「색채어」라고 하는데, 양자의 언어에서 색채어가 같다는 것은 언어의 동질성을 따지는 데 중요한 요소다.색채어와 함께 기초 어휘인 신체어에서도 이같은 단어들이 많이 발견된다. 한국인들은 목(오목한 부분)이라는 단어를 기초로, 손목과 발목이라는 신체어로 활용하고 있는데 이 역시 마야언어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이외에도 마야언어는 친족간의 호칭체계(큰아버지, 삼촌, 외삼촌, 고모, 당숙, 조카, 이모부 등)가 매우 세분돼 있으며, 남자의 연령에 따라 호칭이 변하고 여자는 하대를 하는 등 서구의 언어체계와는 다르다. 이것은 가족과 예절 개념이 발달한 동양의 언어체계와 유사하다』


그는 또 어린 시절 과테말라의 인디오 마을에서 인디오들과 함께 자란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인디오들은 식사할 때 남자 어른들이 먼저 먹고 난 다음에 여자들이 먹으며, 아이들은 맨 나중에 먹는 습관을 보아왔다고 말했다. 또 인디오들은 이가 빠지는 꿈을 꾸면 친척 중에 누군가가 죽는 것으로 생각해 매우 불안해 했다는 것. 이 모두 동양적인, 특히 너무나 한국적인 모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멕시코학자들은 메소아메라카 인종과 아시아 인종이 그 기원에서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친연관계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문화의 직접 수입 문제는 결정 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메소아메리카 문화 독자설을 고집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고구려식 피라미드가 마야의 피라미드와 같다고 해서, 또 언어와 사유체계가 비슷하다 고 해서, 풍습과 생활습관이 같다고 해서 문화 수입의 결정적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이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메소아메리카 문명에서는 비아시아적인 문화도 적지 않게 나타난다. 특히 최초의 문명인 올멕문화에서는 흑인의 모습을 한 인 두상(人頭像)이 느닷없이 나타나는가 하면 백인의 얼굴과 비슷한 조각상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들 조각품들이 발견됐다고 해서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아메리카로 진출했다 거나, 스페인의 코르테스가 아메리카에 상륙하기 훨씬 전에 백인들이 이미 아메리카문화를 개척했다고 보기 어렵다. 멕시코 학자들은 이런 이유를 그대로 아시아문화에도 적용시키는 것이다.

 


편두의 비밀을 찾아

 

그러나 한국사람은 멕시코의 메소아메리카 문화를 구경하는 동안 멕시코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연의 일치」를 적잖게 맞닥뜨리게 된다. 이렇게 우연이 많아지면 당연히 어딘가에 연결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다시 파칼왕으로 돌아가보자. 파칼왕의 편두 역시 가야여인의 편두와 「우연의 일치」에 의해 똑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먼저 마야문화에서 실제로 편두 인골이 있는지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파칼왕의 편두는 실제 유골이 아닌 얼굴을 덮은 데드마스크에서 확인됐기 때문에 실물을 보고 싶었다.


멕시코시티에 있는 국립인류학박물관을 찾았다. 차풀테펙 공원의 숲속, 레포르마 거리에 있는 이 박물관은 12만5천㎡의 부지에 건물 면적만 4만4천㎡를 차지할 정도로 엄 청난 규모여서 박물관 전체를 보는 것만도 꼬박 하루는 걸린다. 1964년에 개관된 국립인류학박물관 역시 지금은 타계한 알베르토 루스와 연관이 깊은 곳이다. 그는 이곳 관장을 맡으면서 의욕적인 활동을 해 후에 「마야문화의 교황」이라는 별명까지 듣기도 했던 것이다.


전시실 이곳저곳을 특히 편두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편두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들의 벽화나 인물 조각상은 너나없이 이마가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한마디 로 마야인들은 대개 편두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한 전시실에는 편두 인골을 전시해두고 있었는데, 부산대 박물관에서 본 것과 또같았다. 그리고 인골 위에는 마야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편두 패션을 했는지도 그림과 함께 자세히 소개하고 있었다. 요즘에는 정상인 두개골이 그 당시에는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모두가 두개골 변형 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야학자들은 왜 마야인들이 편두를 하고 있었는지 아직 그 의미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올멕문화 이후 거의 모든 메소아메리카 문명에서 발견되는 편두 풍속에 대해 밝혀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너무나 이상했다. 기자 역시 멕시코 유적지를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편두에 관한 자료를 찾았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러던 차 마야문명의 본거지인 유카탄반도의 주도(州都)인 메리다에 머물 때다. 저녁을 먹고 산책겸 시내도로를 거닐다가 우연히 한 책방에 들렀다. 거기서 영문판으로 「 방울뱀 학교」라는 다소 재미있는 제목을 단 소책자가 눈에 띄어 책을 뒤적거리는데, 뱀신앙과 편두를 연결시켜 해석하는 소제목이 번쩍 눈에 띄었다. 저자를 찾아보니 이 고장 사람. 부랴부랴 저자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저자는 시원시원하게 응락해 다음날 그의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울뱀 신앙과 편두

 

그는 호세 디아스 볼리오라는 80대의 노신사였다. 마야문명과 방울뱀이라는 특이한 주제에만 50여년을 바쳐 연구한 그는 멕시코 학계에서는 재야학자로 통하는 노인이었다. 한국에서 국내 재야사학자들이 강단학자들에게 냉대를 받는 만큼이나 그도 이곳 주류 학계로부터는 배척당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통역을 맡은 한국인 유학생(고고학 박사 과정)도 멕시코 고고학자들은 학생들이 그의 이름만 거론해도 싫어하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낸다고 거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호세는 마야문명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오로지 방울뱀 및 방울뱀 숭배신앙과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연구 중 몇가지는 학계에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공했으나, 그의 주장이 너무 「튀는」 바람에 오히려 무시당하는 결과를 불러왔다는 것.


어쨌든 그는 방울뱀 신앙이 멕시코뿐 아니라 중앙아메리카 전 지역에서 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여러 가지 증거를 들면서 열정적으로 자신이 밝혀낸 것들을 설명했다.


『고대 마야인들은 스스로를 차네스(chanes), 즉 뱀들이라고 불렀다. 뱀 특히 방울뱀은 매우 신성하고 영적인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뱀에 대해 대단히 깊은 신앙심 을 가졌고 나름대로의 신앙 입문(入門)의식을 가졌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도들이 남자아이에게 포경수술(할례)을 하듯이, 기독교인들이 침례의식으로 하느님의 선택된 아들 이라고 선언하듯이, 마야의 어린아이들, 적어도 귀족층 아이들은 머리를 납작하게 만드는 의식을 치러야 했다. 이 의식은 매우 고통스러워 간혹 아이들을 죽게까지 했기 때 문에 인류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단순한 패션이라고는 볼 수 없다.


만일 그 의식이 단순한 패션(유행)이라고 한다면 어느 부모가 그런 불필요하고 고통스런 의식에 자신의 아이들을 내맡기겠는가. 이런 의식에 대한 유일하고 믿음직한 설명 은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시행됐다는 점이다. 머리 납작하게 만들기(head-flattening)는 아이들에게 이른바 「폴칸(polcan)」 즉 뱀처럼 납작한 머리를 만들어주기 위한 것 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아이들은 뱀의 가족인 차네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편두와 「제3의 눈」


결국 고대 마야인들의 귀족층은 모두 이러한 의식을 거친 끝에 귀족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됐다. 파칼왕이나 그의 아들 찬 발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들은 때로는 아이들을 죽게 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겪으면서도 왜 이같은 의식에 집착했을까.


호세의 주장처럼 뱀의 가족이기 때문에 뱀머리처럼 되기 위한 종교적 의식의 차원이라고 인정한다 치자. 또 하나의 의문은 떠오른다. 납작한 뱀머리는 단순히 뱀의 모양만 닮고자 하는 것이었는가, 아니면 보다 더 깊은 의미가 그 속에 숨어 있는 걸까. 아무도 이에 대한 정확한 해답은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편두와 방울뱀을 연결시켜 생각해보 는 것도 호세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와 연관됨직한 연구결과가 나와 주목을 끌었다. 마야학자인 마이클 코 교수는 마야인들은 심령능력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들 스스로도 예기치 않았던 심령 능력을 개발했다는 증거가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야의 군주는 바이(vay)라고 하는 별개의 자아 또는 분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분신은 꿈을 통해 접촉하는 동물(재규어로부터 생쥐까지 무엇이든)의 형태를 가지 고 있었다』는 것. 그는 또 『마야 도시들의 일정한 건물에는 마야 왕들이 「환상의 탐구」를 위한 특별한 침실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즉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처 럼 그들도 미래를 예지하고 현재를 이해하는데 꿈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마야인들이 어린아이의 목숨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집착했던 편두의 비밀에 대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일찍부터 영적인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고 말이다.


실제로 기자는 귀국한 뒤 한국의 기공사들에게 편두머리에 대한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문의를 해보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편두행태는 이마 안쪽에 있는 제3의 눈(인간 의 영혼을 볼 수 있다는 눈)을 개발하려는 의식이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가야에 나오는 편두 역시 가야의 귀족층들이 영적인 능력을 개발하기 위한 방편이었을까. 그들은 혹시 조상의 영혼을 모시는 제사를 집전하고 하늘의 움직임을 살피는 여사제(女司祭)들은 아니었을까.

 

기록에 있는 한국의 편두문화


1)『아이가 태어나면 곧 돌로 머리를 눌러두어 평평한 머리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지금의 진한 사람들은 모두 편두이다(兒生, 便以石厭其頭, 欲其遍 , 今辰韓人皆遍頭)』 (진수, <삼국지> 동이(東夷)열전)


2)『편두는 신라 왕(잇금)의 존귀함이었고, 말은 범음(산스크리트어)을 차용해 썼다…마땅히 군자의 고향이라(遍頭, 居昧錦之尊, 語襲梵音, 彈舌足多羅之字…宜君子之鄕也) 』(최치원, 지증대사비문)


1)은 중국 진(晉)나라 때 역사가인 진수(陣壽)가 중국 삼국시대(위나라, 촉나라, 오나라)의 역사(서기 220~265년)를 기술하면서 동시대에 존재한 동이족 국가들의 역사와 풍속을 설명한 글이다. 사학자들은 「동이」라는 말은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을 가리킬 때 쓰는 용어라고 한다. 「진한」 역시 고대의 동이족 국가를 설명하는 것이므로, 이 기록은 의심할 여지없이 서기 3세기 경 우리 조상들의 풍속을 묘사한 것임이 틀림없다.


2)는 모두 18개 한자로 된 이 간단한 중국측 기록에 대해 아쉬움을 가졌던지 우리 조상이 직접 남긴 글이다. 바로 신라 말의 대석학인 최치원(崔致遠)이 지증대사비(智證大師碑)에 새겨놓은 것이다. 신라왕이 편두에다가 이상한 말을 사용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다. 이 비는 현재 경상북도 문경 봉암사에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지구의 서로 반대되는 지역에서, 그것도 비행기 등 교통의 이기를 생각할 수 없는 고대에 이와 같은 구전과 기록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마야문명에서 귀족층 이상의 자 제들이 종교적 의식으르 치른 머리 납작하게 만들기와 신라의 옛 임금들이 그 존귀함을 드러내는 상징으로서 편두였다는 최치원의 기록은 참으로 이상한 일치를 보여준다.


또 그것은 베링해를 건너간 그 먼 옛날의 아시아 인종들이 두 대륙에서 제각각 독창적으로 편두머리를 했다는 설명보다는 역사시대에 들어선 그 어느날 아시아에 있던 편두 형 패션 집단이 일본을 거쳐 태평양을 가로질렀든, 베링해를 건넜든 아메리카로 건너가 직접 문화를 이식했다는 것이 더 논리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그것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한국의 학자들이 아닌 바로 중국의 학자들이다. 『용봉문화원류』라는 책으로 중국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해진 王大有(문화인 류학자)는 『중앙아메리카 최초의 문명인 올멕문화는 중국에서 은나라가 주나라에게 망할 때 피란한 은나라사람들 즉 동이족이 세운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중국과 멕시코 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물적 증거를 제시했던 것.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역사전 사건도 수집해 발표했다.


1910년 청나라의 외교관인 歐陽庚(구양경)이 멕시코에서 2년 전의 멕시코 혁명 당시 사살된 화교 3백여명에 대한 배상문제를 협의할 때 일이다. 그때 멕시코 인디오 1백여 호의 추장이 청국 주멕시코 특사관에 찾아와 자신의 부탁을 들어달라고 청원했다. 그들은 『혁명 때 피살된 인디언들은 모두 7백50명이다. 우리 인디언 은푸보(Infubo)족은 3천년전에 이곳으로 온 당신네와 같은 칸 혈통이니 우리도 보호해 배상받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이에 놀란 구양경은 즉시 청나라 외무부에 보고문을 보내자, 당시 왕인 선통제 섭정왕은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현재 이 문서는 정식 외교문서로 대만 양명산 외교부 자료보관처에 보관돼 있다.


『인디언 은복포족은 스스로 칸족이라 칭하고 있는데, 법적으로는 근거가 없지만 배상을 받도록 함이 좋을 것 같다. 현재 화교들 중에는 은민(殷民)의 동천(東遷) 사실이 남아 있지 않고, 그 인디언들은 스스로 칸혈통(청국민)이라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 지 3천년이라 하니 우리 칸민족의 역사에 놀랍다. 하지만 국제법적으로 한계가 있슴은 어쩔수 없어 유감스럽다. 구양경은 청국 주멕시코 특사관 일을 끝내고 주파나마 제1대 총영사로 부임하라』


사실 여부를 떠나 놀라운 점은 멕시코 인디오들 스스로 자신들을 중국에서 건너온 은나라의 후예로 자처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도미한 지 3천년이 됐다는 점이다.


이같은 주장은 우리 고대사를 새로운 눈으로도 볼 수 있다는 신선한 충격이다. 바로 멕시코 문화유적을 탐방하며 우리문화와의 연관성을 나름대로 추리하고 판단해보면 한 결 재미가 있을 것이다.


안영배<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